프랑스 월드컵의 추억혜미와 마지막 통화를 한 뒤,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며칠 뒤 아버지도 퇴원을 하셨고, 과외도 여전히 잘 다니고 있었고, 친구들과 만나서 술 자리도 갖곤 했다. 혜미랑 연락을 하지 않는 것만 빼면, 내 일상과 주변의 모든 것은 그대로 인것 같았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얼마전, 성철이를 만나 혜미 얘기를 잠깐 했었다. 녀석은 나와 항상 붙어서 다니다보니, 혜미와의 일은 처음 만났을때부터 대부분 알고 있었다. 나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녀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녀의 과 선배 남자 얘기, 프랑스 여행을 같이 다녀온 남자 얘기, 그리고 지난 6개월 나와의 사이.. 성철이는 중간 중간 깜짝 놀라며, 은근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한번 헤어졌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건지, 괜히 녀석에게 쎈척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건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얘기를 마무리 지었었다. -아무튼..혜미가 인기 많은게 죄지 뭐..- 잠시후, 내 얘기가 마치자마자, 성철이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갑자기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야..우리 나이트 클럽이나 갈까? 내가 쏠께..-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은정이..’ 나이트 클럽 얘기를 해서 였을까?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휴가(?)나온다고 했던 때가, 코 앞에 다다른 것 같았다. 약속했던 것 처럼 정말 서울에 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며칠 후, 은정이가 학원에서 휴가를 나오기로 한 금요일, 오전쯤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거의 한달여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오빠..잘 있었어?- -어..어디야?- -나 서울..신천..헤헤- -거기서 뭐해?- -지금 차에서 내렸어..이제 친구들이랑 점심 먹을려구..- -그래..정말 오긴 왔네..- -응..부모님한테는 그냥 학원에 남아서 공부한다고 했어..헤헤- -아..- 은정이 다웠다. 처음에 봤을때 부터 왠지 모르게 쿨(?)하다는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역시 그녀는 뒷 생각 안하고 우선 지르고 보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소식을 기다렸었고, 내심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지만, 괜히 걱정이 조금 앞섰다. -너 서울에 있는 동안 도서관에서 공부만 해..어디 싸돌아 다니지 말고..알았어?- -치..또 잔소리다..내가 미쳤지..뭐 좋다고 오빠한테 연락을 해서..- 눈으로 볼수는 없었지만, 입을 잔뜩 내밀고선 통화를 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서..이번에도 친구집에 있을꺼야?- -아니..- -그럼 어디에 있을꺼야?- -오빠네 집? 헤헤- -미쳤구나 너..장난치지 말고..- -치..뭐..잠이야 아무대서나 자면 되지..- -휴..너 정말 대책없다..- -그럼 어떻게 해?..친구네 집 불편하단 말야..- 그녀는, 정말로 계획이 없는 것 같았다. 뭐..어떻게라도 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나한테 먼저 이렇게 연락을 해왔는데, 그냥 모른척 하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조금 생각을 해봐야 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일단 그녀를 만나서, 다시 얘기를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지금 친구들 만나고 나면..오늘은 뭐할건데..?- -음..오빠 볼려구 했는데..헤헤..왜 오빠 바뻐?- -아냐..알았어..그럼 나중에 전화해..그쪽으로 갈께..- -응..알았어..근데..오빠!!..- 막 통화를 마치려는 순간,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말 끝을 얼버무리며 나를 다시 불렀다. -학원 친구들이 오빠 보고 싶다는데..-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꺼내는 그녀, 어쩌면 은정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치 않고서야 그녀의 친구들이 나를 보고 싶어할 이유가 없었다. -친구들이 몇명 있는데?-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3명, 아니다 4명..한명은 저번에 봤던 효진이구..기억나지?- -응..기억나..- -올수 있겠어?- -갈수는 있는데..여자들만 4명 있는데 혼자 가기 뻘쭘하다- -하하..괜찮아..- -음..그러면 나 혼자 가기 그러니깐 성철이 데리고 갈께..괜찮지?- -그래..아싸..효진이도 좋아하겠다..오빠 고마워..- -알았어..어디로 가면 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위치를 확인하는 내 물음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잠시후, 그녀와 통화를 마친 뒤, 나는 재빨리 나갈 준비를 하면서, 성철이에게 연락을 했다. -성철아..저번에 봤던 효진이 기억나지?..걔가 너 보고 싶대..- ***** 2시간 후 신천, 어느 고기 부페 집이었다. 은정이와 효진이,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 답답한 학원을 나와 모처럼 느껴보는 해방감 때문인지, 금요일 대낮부터 그녀들은 폭주를 하고 있었다. 재수생들이 술을 잘 마신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 광경을 지켜보기는 처음이었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무시할게 아니었다. 한두잔씩 그녀들이 건내는 술잔을 받다보니, 나도 어느새 5-6잔은 비운것 같았고, 술을 좋아하고 꽤 마신다는 성철이 조차도, 정신이 빠져서 반쯤 헤롱헤롱 대고 있었다. 은정이는, 막상 나를 보고 나서는, 오랫만이라 수줍어서 그런건지, 아님 지금 이 상황이 조금 뻘쭘했는지, 얌전한(?) 모습으로 옆에 앉아 있었다. 아까전 통화할때만해도, 시원 시원하고, 지 멋대로 였었는데,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영낙없이 새침하고 얌전한 스무살의 여자애였다. 나는, 오늘 그녀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외모가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했다.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던 그때의 노랑 머리도 원래의 머리 색깔로 돌아와 있었고, 날이 더워서 그런지, 옷도 한결 가볍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보면, 은정이는 생긴것만 봐서는, 참 이쁘고 말도 잘 들을거 같은데, 어디서 그런 깡따구(?)가 나와서 발칙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볼수록 독특하고 신기한 구석이 있었다. -오빠는 은정이 어디가 좋아요?- 마침 그때, 그녀들중 한명이 내게 물어왔다. 서로 어디까지 나에 대해 얘기들을 했는지, 분위기만 봐서는 이미 나는 은정이의 남자 친구였다. -음..이쁘고..착하고..솔직하고..- 그녀의 물음에, 나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솔직하게 대답을 했는데, 그녀가 말을 이어서 또 다시 물어왔다. -은정이 몸매도 이쁜데..오리 궁둥이예요..봤어요? 호호- -하하..- 그때, 옆에 있던 은정이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미친년..취했냐..너?- 그러자, 그녀도 은정이를 향해 지지 않고, 정색을 하면서 받아쳤다. -왜 맞자나..너 몸매 이뻐..호호- -야..조용히해..- 다른 친구들은, 그런 그녀들을 보면서 웃어대기 바뻤고, 그중 누군가 한명이, ‘에이..오빠도 알겠지..호호’ 라고 말했을때는, 전부다 빵하고 터졌던 것 같다. 역시, 술이 많이 들어가서 인지, 여자들이 많은 자리여서 그런건지, 대화가 거침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 그녀들을 봤을때만 해도 약간 뻘쭘했는데, 술이 들어가서인지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그 상황을 받아 넘길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재밌었다. 사실 내가 정색하고 아니라고 할 것도 아닌것 같고,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같이 웃어댔다. 그런 내가 능글맞어 보였는지, 잠시후 은정이는 팔꿈치로 내 팔을 툭치면서 곁눈질을 해왔다. -오빠는 뭐가 좋다고 웃어?- -하하..재밌자나..그럼 내가 지금 울어야 돼?- -치..아무튼..- 입을 내밀고 심퉁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문득 장난끼가 들었다. 그녀의 귀에다 입을 살며시 갖다 대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너 진짜 오리 궁둥이야?- ‘퍽’ 그녀의 주먹이 날라와, 정확히 내 가슴을 쳤다. 그저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물어본 것 뿐인데, 말대신 주먹을 내미는 그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더니.. 아무튼 성질은..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노래방에서 놀고, 밖으로 나왔을때쯤은, 저녁 6시 정도 된 것 같았다. 배도 부르고, 술도 많이 마시고, 거기다 노래까지 불렀으니, 각자 헤어지자고 하는 분위기였다. 잠시후,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한명 두명 보내고 나자, 나와 은정이, 성철이와 효진이, 이렇게 넷만 남게 되었다. 성철이는, 역시 고기집에서 무리해서 달린다 싶더니, 결국 노래방에 들어가서는 기력 한번 피지 못하고, 효진이의 무릎에 누워서 잠만 잤었다. 문득, 녀석이 끌고온 차가 걱정이 되었다. 얼마전에 친구들중에는 가장 먼저 차를 구입해서, 한참 녀석은 개폼을 잡고 다니고 있었다. 성철이는, 노래방을 나오면서는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운전을 할 정도는 되보이질 않았다. 내가 운전이라도 할 줄 알면 녀석의 차를 대신 끌고 가면 좋겠는데, 나도 술 기운이 남아있었고, 운전을 막 배우고 있던 입장이라서, 쉽게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결국, 차를 그대로 두고 움직이기로 하고선, 우리 넷은 잠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를 들어갈까, 한참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마침 그때, 효진이가 입을 열면서, 저번과 같이 각자 따로 행동을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성철이 오빠는 내가 알아서 할께..- -네가..어떻게?- -어디 비디오방 같은데 가서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뭐..- -아..- -아무튼 우리 신경쓰지 말구..오빠랑 은정이는 알아서 해- -…- 그녀의 태도는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것 같았다. 은정이처럼 길에서 헤메지도 않을 것 같구.. 성철이도 내심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한 뒤, 은정이를 보면서 말했다. -그럼 우린..이제 공부하로 가자..- 그녀가 내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눈을 홀겼다. 농담도 못하나.. 그나저나 볼수록 이쁘게 생긴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입맞춤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결국, 그녀와 나는, 택시를 타고 우리 집 근처로 가서는 잠시 주변을 배회했다.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적당치 않았다. 은정이가 가지고 온 작지 않은 가방이 불편하기도 했고, 술 기운이 여전히 남아서 계속 걷기에도 힘이 들었다. 근처에 있던 숙박 업소가 눈에 들어왔다. 모텔 같은 호텔인 그곳, 그곳은 예전 혜미와 자주 찾던 곳이였다. 혜미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오늘 저기서 있자..- 잠시후, 나는 은정이에게 그말을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나이트에서 그녀를 만나 원나잇을 했던 그 날보다도, 훨씬 가슴이 더 두근 거리는 것 같았다. 결국, 은정이와 나는, 저번과 같이 약간의 서먹함을 느끼면서, 두번째로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오늘 하루 종일, 그녀가 이쁘다는 생각을 해서 였을까?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곳을 들어가면서까지, 가슴이 계속해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아마 그때가, 7시가 겨우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 다음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