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년(壬戌年) 무자월(戊子月) 경술일(庚戌日) 병진생(丙辰生) 이정옥(李貞鈺)이라.” 중년에 접어든 듯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조금씩 보이고, 검정색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가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고 걸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 앞에는 체구에 비해 꽤 넓어 보이는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남자는 앞에 놓인 백지에 무언가를 적더니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책상위에 펼쳐진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책상을 가운데 두고 남자의 건너편에는 중년을 훌쩍 넘어 이제 장년기로 접어든 듯한 부인 한명이 호피무늬가 새겨진 카펫위에 놓은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작은 사무실 한쪽은 전체적으로 유리로 된 창문이었으나 짙은 감색으로 썬팅이 되어서인지 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거의 없었고 천정에 매달린 몇 개의 형광등이 실내를 어둡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유리창 아래쪽에는 더블 침대보다 조금 큰 크기에 책상 정도 높이로 검정 천으로 덮인 것 눈의 띄었지만 안쪽을 볼 수 없는지라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 뒤쪽에 있는 작은 철문에는 한지에 얼핏 보기에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기가 쉽지 않은 그림이 붙어있었다. 철문 옆에는 커다란 붓부터 작은 붓까지 붓이 몇 개 걸려있었고 그 아래 작은 탁자에 벼루와 먹, 화선지 그리고 몇 개의 물감이 놓여있었다. 유리창 건너편 남자의 옆쪽에 있는 두 개의 책장에는 꽂혀진 책들의 제목은 주로 한자였으며 가끔 한글과 영문 제목도 보였다.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는 장년의 부인의 뒤쪽에 굳게 닫혀있는 철문에도 역시 정체를 알기 힘든 그림이 붙어있고 문과 유리창 사이에 놓인 진열장은 골동품으로 보이는 자기와 향로, 놋그릇 같은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오행 중 토성(土星) 즉 흙 기운이 아주 강한 사주(四柱)에 이름까지 흙 기운이 강하네요.” “네?” “선고후패(先苦後敗)에 신피공와(身疲功訛)라. 힘들게 일하지만 이루는 게 없고, 몸은 피곤하며 공은 무너진다. 즉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많지 않아서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힘든 사주인데다 이름에까지 어려움이 겹쳐있어요. 이런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액운이 끼어 실패를 거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름이라도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복덕귀인(福德貴人)이나 천사성(天赦星)을 타고난 귀인을 만나면 액운을 해소하고 흉(凶)이 길(吉)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귀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이름을 바꾸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합니다.” “그럼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의자에 앉아있던 장년부인이 조바심이 나는지 의자를 당겨서 책상 가까이로 다가선다. 안경너머로 그런 장년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입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는 재빨리 사라졌기 때문에 장년부인은 남자의 그런 미소를 알아볼 수 없었다. “오행(五行)에서는 수생토(水生土)요 토생금(土生金)이라 합니다. 이 말은 흙에 활기를 넣어주는 것은 물이요, 흙은 쇠에 활력을 북돋아준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따님의 경우에는 이름에 물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름을 하나 지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앞서서 따님의 지나온 삶을 알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 장년부인은 그제서야 생각 낫다는 듯이 탄성을 내고서는 핸드백을 뒤져 고운 포장지로 쌓여진 물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건넸다. 순간적으로 남자의 눈이 빛났지만 역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서 장년부인이 미처 눈치체질 못했다. “본인이 쓰던 속옷을 가져오면 과거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해서..... 가장 깊숙한 부위에 있는 속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장년부인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마쳤다. 남자는 포장에 붙은 테잎을 떼고 젊은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팬티를 꺼내 그 위에 손을 얹고서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워낙 작은 소리였고 나지막하게 알 수 없는 말들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바람에 장년부인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무슨 주문을 외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복이 있는 부모님을 만나 부모님이 도와주는 덕분에 초년(初年)에는 큰 화를 겪지 않았지만 역시 괴로움이 많았네요. 그러나 어렵고 힘든 것은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학업과 학교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았고 취직에도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앞으로 시련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까이는 일주일 안으로 취직에 또 한번 실패를 겪고 몸도 크게 아플 것 같네요.” “예?” 코끝에 걸친 안경너머로 바라보며 얘기하는 남자의 말을 들은 장년부인이 놀란 눈을 하였다. 이어 다급해진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서 책상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남자에게 애원조로 말을 했다. “원장님.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이름을 바꾸라면 개명을 하겠습니다. 복채는 서운하지 않게 넉넉히 드릴테니 걱정 마시고.....” “........” “필요하다면 부적(符籍)이라도 하나 써주세요. 부적 값은....” “아주머니!” 남자의 침묵에 몸이 닳았는지 장황하게 얘기하려던 장년부인의 말은 남자의 낮고 굵직한 소리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화라도 난 듯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고 그런 눈빛을 받은 장년부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그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부적이나 팔아서 돈을 벌려고 하는 그런 장사꾼으로 보입니까? 왜 말 끗 마다 돈 돈 하세요.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적 한 장에 한 십억 정도 쓰시겠다는 말인가요? 그 돈 줘도 난 부적 못써줍니다. 그냥 가세요.” 남자가 단호하게 말하며 젊은 여자의 팬티를 포장지에 넣어 책상 건너편으로 밀어주자 장년부인은 얼굴이 파래지며 기겁을 했다. “원장님......” “가지고 가세요. 복채도 필요 없으니 대기실에서 직원에게 되돌려 받아가세요.” “원장님. 죄송합니다. 딸년이 고등학교까지는 그럭저럭 어떻게 마쳤는데 재수 삼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도 학과에 적응을 못하고 자꾸 과를 옮겨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시험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고도 미련을 못 버리고 공부한다고 처박혀 있으니..... 부모 된 입장에서 답답하고 안타깝고 걱정이 앞서는 바람에 제가 그만 원장님한테 실수를 했네요. 못난 인간이 자식새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 그랬거니 이해하시고...... 원장님 하라는데로 뭐든지 할테니..... 제발 우리 딸 좀 어떻게 도와주세요. 네 원장님.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장년부인은 말을 하며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남자는 장년부인의 애절한 마음을 읽었는지 노기를 품은 눈빛을 풀고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주머니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다고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니 일단 일어나서 의자에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제 잘못이 있으니 이렇게라도 있겠습니다.” “아주머니 자세가 불편하면 저도 편하지 못합니다. 제 마음이 편해야 따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아닙니까?”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년부인을 달랬다. 그때서야 장년부인이 일어나 치마가 날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아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장년부인이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책상에 있는 팬티를 집어 유리창 쪽으로 걸어갔다. 검정 천을 걷어내자 나무로 된 탁자위에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석판이 나타났다. 남자는 팬티를 뒤집어 살이 닿는 부분이 밖으로 노출되도록 하여 잘 펴서 석판위에 반듯하게 펼쳐놓았다. 뒷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벽에 걸린 붓 가운데 하나와 벼루, 먹 그리고 물감 몇 개를 챙겨가지고 다시 석판 쪽으로 왔다. “지금부터 따님에게 달려있는 액운을 없애달라고 천지신명님께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기도하세요.” “네.” 장년부인은 앉은 자세에서 눈을 감더니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남자는 석판 앞에서 눈을 감고 잠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어라 주문을 외는 것 같더니만 눈을 떠서 붓을 잡았다. 먹물을 묻혀 아주 천천히 팬티에 무언가를 그리더니 다시 물감으로 또 무언가를 그렸다. 한 참을 무언가를 그리던 남자는 손을 멈추고 잠시 팬티에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더니 만족한 웃음을 떠올렸다. 붓을 비롯한 그림 그리던 도구들을 챙겨서 제자리에 놓아두고 그림도구가 놓인 탁자 아래 문을 열어 그 속에 있는 물통에 붓을 씻어서 물기를 짜낸 다음 제자리에 걸어두었다. 유리창 쪽으로 가서 작은 창문 하나를 열고 담배 하나를 입에 문 남자는 창문너머로 연기를 거침없이 내뿜었다. 남자는 담배를 다 피우고 석판으로 걸어가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팬티를 들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장년부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단정히 앉은 자세에서 치마 밑으로 매끈하게 벋어져 내려간 종아리와 앙증맞아 보이는 양말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 됐으니 그만 눈을 뜨셔도 됩니다.” 장년부인이 눈을 뜨고서 남자가 내미는 딸의 팬티를 바라보니 가장 은밀한 부분이 맞닿는 곳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딸의 가장 은밀한 곳에 저 그림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장년부인은 재빨리 딸의 팬티를 받아 포장지에 쌓아서 핸드백에 넣었다. “주의할 점은 오늘 그 팬티로 갈아입고 앞으로 일주일간 다른 것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 빼고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부적의 일부분이라도 지워지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부적은 일주일짜리 부적이라 일주일이 지나면 부적은 효과가 없어집니다. 그때는 따님을 데리고 오셔서 따님이 직접 부적을 받아가야 합니다. 똑같은 부적을 똑같은 방법으로 두 번 이상 써 줘봐야 효과가 없기 때문에 오늘처럼 아주머니가 오신다면 부적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간 막아두었던 액운이 더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액운을 막기가 더더욱 힘들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만 더한다면, 혹시 따님이 부적을 거부하거나 일주일 뒤에 오지 않는다면 더 큰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미리 얘기한 것처럼 그때는 더 강한 액운이 덮치게 되고 액운을 막기가 더 힘들다는 말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꼭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고, 부적 값은 반만 주시고 일주일 뒤에 오셔서 효과가 있었다면 나머지 반을 주세요.” “감사합니다.” 공손히 인사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걸어 나가는 장년부인의 뒷모습을 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당신 딸의 팬티를 만졌을 때 잠시 앞으로 일주일간을 미리 내다 보았소. 당신 딸은 어떤말을 하더라도 그 팬티를 앞으로 이틀간은 입지 않을 것이오. 이틀이 지나면 심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고 그 몸살은 사흘이 지나면 나을 것이오. 물론 당신은 우격다짐으로 나흘 뒤에는 딸에게 그 팬티를 입힐 것이고 꼭 하루 만에 아픈 것이 씻은 듯이 낳고나면 일주일 뒤에는 당신과 딸이 새벽같이 나에게 달려올 것이다. 그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면서 당신 딸의 몸에 새롭게 부적을 써주겠소.’ 남자는 어느새 젊은 여자의 벌거벗은 몸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즐거운 상상과 함께 흐뭇한 미소를 짓던 남자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 표정을 바꿔 근엄한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사주(四柱) 보려는 사람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됩니까?” 책상 앞에 조금은 삐딱한 자세로 앉은 중년의 여인을 보면서 남자는 지극히 사무적이고도 무덤덤한 말투로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