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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천사 - 4부
최고관리자 0 54,046 2023.03.10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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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말을 엿보다 잠시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와 나의 침묵만이 서로 등을 대고 하나되어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선생님이 말씀 없으시네요.” “그렇게 됐군요.” 흰색 블라우스에 흰색 미니스커트. 내 지시 그대로 입고 온 강현주, 그녀가 하얗게 내 앞에 선 순간에 내 머리도 하얘지고 있었다. 숨김 수 없는 욕망. 누구에게도 제어되던 욕망이 왜 이 여자 앞에서는 자꾸만 무너지려고 하는 걸까? 그 이유를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그녀와 나의 줄다리기는 어느새 내가 그녀를 끌고 있는지, 그녀가 나를 끌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혼돈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를 향한 나의 욕망이었고, 이제 그녀는 내 욕망의 제물이 되기 위한 어둠의 길로 점차 들어서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내 유도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나는 그러한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그녀에게 어느덧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난 주 이후는 어떻게 지냈는지 말씀 드릴까요?”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아뇨. 늘 똑 같아요.” “남편은… 어때요?” “그이는…… 똑 같아요. 매일 10시쯤 와서 씻고 자고 아침에 나가죠.” “관계… 했나요?” “아뇨. 그이와 안 한지 1년도 넘었어요.” “그럼…… 하고 싶다는 생각… 들 때가… 없나요?” “물론…… 있어요.” “어떤 때인가요?” “……” “내게는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해줘야 하는 것, 알고 있죠?” “…… 네……” “어떤 때?” “저……” “말해봐요. 어서.” “실은…… 선생님… 생각날 때요…” “나…요?” “네……” “어떻게요?” “그냥, 선생님 생각이 날 때면 이상하게… 젖어요.” “나쁜가요?” “무엇이요?” “나를 생각하고 젖는 것.”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좋아요?” “…… 네……” “나를 생각할 때만 젖나요?” “……” “지금도 젖었어요?” “선생님…..” “말해봐요. 젖었어요?” “말해야 하나요?” “그럼 말하지 말아요. 내가 직접 확인하면 되니까.” “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가만히 있어요. 착한 아이처럼. 그래요, 그렇게. 나는 당신을 치료하는 의사니까 당신은 가만히 내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되요. 그렇죠?” “선생님…” “치마를 걷어 올려서 당신의 다리가 해방되게 해줄 거에요.” “무엇으로… 부터요?” “당신 마음의 억압으로부터.” “아……” “어때요, 당신의 두 다리가 밖으로 해방되어 나왔어요. 느낌이 시원하죠?” “네…” “해방이 되었으니 기쁨의 축제가 필요하겠죠?” “어, 어떤 축제 말인가요?” “가슴이 떨리고 흥분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축제요.” “그런 것도 있나요?” “있어요. 여기 이렇게.” “하아…. 선생님…” “내 손가락들이 당신의 다리를 타고 요정처럼 놀고 있어요. 오늘 축제에 초대받은 손님들이죠. 어때요? 사랑스럽죠.” “네… 귀엽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워요!” “요정들이 즐겁게 당신의 다리를 즐기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당신의 다리처럼 예쁜 다리를 요정들은 본 적이 없다고 해요.” “정말요?” “네, 정말요. 그래서 더 많이 더 위로 더 깊이 놀러 가고 싶어해요.” “어, 어디로요?” “허락해줄 거죠? 거기가 어디든.” “하지만… 너무 깊이는……” “요정들은 당신을 무척 아끼고 사랑해요. 그 사랑을 느끼기 위해선 당신도 마음과 몸을 열어야 해요. 사랑으로 그들을 맞이해야 해요. 할 수 있죠?” “아……” “요정들이 실망하려고 해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이 싫어한다고 할까요?” “싫지는… 않은데…..” “그럼 더 깊이 초대해줄 거죠?” “네… 그래요…….” “잘했어요. 요정들이 아주 즐거워해요. 자, 요정들이 당신과 즐길 수 있게 다리를 조금 벌려줘요.” “이, 이렇게요?” “잘했어요. 당신의 깊은 곳도 즐거워하는 것 같군요. 그렇죠?” “모르겠어요. 그냥 떨리고… 무섭고… 흥분되고… 좋아요.” “요정들이 당신의 숲에 들어왔어요.” “아아… 부끄러워요!” “그냥 즐겨요. 이건 축제니까. 봐요, 당신의 샘에서 물이 마구 솟아나잖아요.” “아하…. 어떡해……” “따뜻해서 좋아하네요. 샘물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해요.” “아, 이상해요! 몸이 막… 떨려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아아……” 그녀의 허리가 급하게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가 내려 앉았다. 내 손은 이미 그녀의 가운데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허벅지를 비벼대며 쾌락의 몸부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리 뱀장어처럼 휘어 몸부림치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도 점차 충혈되어왔다. 만약 여기가 상담실이란 의식마저 꺼져버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몸을 내 몸으로 덮었을 것이다. “어때요, 이 축제가?” “하아… 좋아요. 너무… 자극적이고 미칠 것 같아요.” “더 즐기고 싶어요?” “네!” “더 강하게?” “더 강하게요?” “네.” “그러다 감당할 수 없으면…… 어떡하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 기쁨을 계속해서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느끼고 싶도록 중독되면… 말이에요.” “몰랐군요. 당신은 이미 중독되었어요.” “그, 그런 거에요?” “네.” “그럼 이제 난 어떡하면 되는 거죠? 무서워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주겠어요.” “정말… 이죠? 선생님만 믿으면 되는 거죠?” “그래요. 날 믿어요. 언제나 당신을 도와줄 테니까.” “고마워요, 선생님.” “고맙긴요. 당신은 나의……” “저는 선생님의… 뭔가요?” “행복한” “행복한…?” “노예죠.” “노예……” “네. 나의 노예.” “나는 선생님의… 노예…” “그럴 거죠?” “……” “이건 당신이 원해서 하는 계약과 같아요. 대신 한번 맺으면 다시 파기할 수 없는 영원한 구속이기도 해요. 하겠어요? 나의 노예?” 자기 방어의 무의식과 유도된 의식의 치열한 싸움이 지금 그녀의 머리 속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나도 무척이나 흥분된 이기심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점심은 어쩐 일로 비싼 초밥이에요?” “매일 가정식 백반 먹는 것도 좀 지겹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요새 영 수입도 별볼일 없으시면서. 이러다 병원 문닫는 거 아니에요? 직장 잃기 싫은데.” “걱정 말아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아, 그냥 좀 믿어봐요.” “헐! 믿게 해주셔야 믿죠!” “수영씨,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면서요!” “치사하게 그걸 이렇게 써먹다니. 흥!” “그래서 싫어요? 계약 파기 해요?” “선생님 정말 이렇게 자꾸 치사하게 나올 거에요?” “네!” “……” “문제 있어요?” “아뇨, 없어요.” “그럼 됐죠? 식사하면 되죠?” “그 전에 잠깐 만요.” “아, 또 뭔데요?” 이양이 상체를 내게로 들이민다. “뭘 어쩌라구요?” “할거면 우리 확실하게 해요.” “뭘요?” “관계!” “그 말 정말이죠?” “절 뭘로 보시는 거에요?”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거죠?” “네. 제가 정리를 원할 때까지는요.” “흠… 좋아요. 대신 적어도 향후 3년간은 정리할 수 없다는 조건이에요.” “그건 왜요?” “수영씨가 갑자기 일 그만두면 내가 힘드니까.” “그럼 뭐에요? 3년간 절 부려먹겠다는 거에요?” “네. 노예처럼!” “정말?” “정말!” “……” “싫으면 지금 빨리 말해요. 나도 맺고 끊는 건 확실한 사람이니까.” 이양이 내 눈을 들여다 본다. 내 마음의 빚장을 열어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어림없다. 사람의 심리를 공부하고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나를 감출 수 있는 훈련과 노력이 부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점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자신이 있다. “뭐, 그러죠.” “그 말에 전적인 책임을 질 거죠?” “네.” “그럼 식사하고 내가 병원에 가있는 사이 치마로 바꿔 입고 와요.” “왜요?” “질문은 하지 말고.” “알았습니다, 주인님!” “좋군요, 주인님 소리. 또 하나!” “뭔데요?” “No underwear!” “……” “문제 있어요?” “아뇨……” “그런데 왜요?” “오늘 저… 원하실 거에요?” 이양의 시선을 눈의 힘으로 내리 누른다. “내 맘!” 식사를 하는 내내 이렇듯 다소곳한 이양은 처음이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 도무지 이양같지 않은 생소함. 어쩌면 막상 나와의 관계를 새로 시작하자니 마음에 부담이 되는지도 몰랐다.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요샌 겉으로 봐서 알 수 없는 포장된 인격체들과 상상할 수 없는 특이한 성적 취향의 사람들도 있곤 하니까. “걱정돼요?” “뭐가요?” “나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 “전혀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 표정이 어때서요?” “걱정근심이 가득한 것 같은데.” “당연하죠.” “역시 좀 힘들겠죠? 그럼 없던 일로?” “지금 장난해요? 손님이 없어서 월급도 못 받게 생겼는데 그럼 걱정이 안돼요? 거기다가 3년간은 완전히 발이 묶일 판인데?” “뭡니까? 지금 그런 걸 걱정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럼 내가 뭘 걱정하겠어요?” 아무래도 내가 이양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일지도 몰랐다. 다시 입을 오물거리며 식사를 하면서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이양의 표정이 나는 정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때까지 조용하던 이양이 내 옆에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아니 주인님.” “네?” “어허! 주인이면 주인답게 행세하셔야죠. ‘네?’가 뭐에요? ‘응!’ 이래야지.” “말 놓으란 거죠?” “주인이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죠 그럼.” “어허!” “이거 지금 노예가 주인을 겁주는 거죠? 아니… 겁주는 거지?” “맞아요. 주인 노릇 제대로 하라고.” “노예가 맞긴 해요? 아무래도 주인 위에 있는 옥상옥 같은데.”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으시군요. 히히……” 정말 기분이 쎄~하다. 아무래도 자꾸만 내가 덫에 걸린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어제 강현주씨는 잘 왔다 갔어요?” “네.” “특별한 일은 없었구요?” “의사와 환자간의 비밀유지에 대한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그거 말고 남자와 여자로서의 일에 대한 거에요.”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거 질투해서 하는 말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 우리 관계의 기본은 믿음과 신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러니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강현주씨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은 단순히 의사로서 환자를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 아니란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어요. 내 말이 틀려요?” “……” “어디까지 갔어요?” “뭐가 어디까지 가요?” “어허! 정말 이럴래요? 나 뒤집어지면 장난 아니에요. 성질테스트 하지 마세요!” 안그래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했어요?” “……” “했군요?” “아니에요!” “그래요? 그럼… 할 거군요?” “……” “뭐, 좋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한가지는 명심하시는 게 좋아요. 강현주씨와의 관계는 엄연히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기본이란 걸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가 하려는 말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었다. “그 관계를 오래도록 지속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만약 그러려고 한다면……” 눈으로 그 다음 말을 물었다. “?” “어쩌면 두 사람… 죽게 될지도 몰라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리는 전율! 이양의 말이 허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짜릿한 공포감! 그래, 어쩌면 나는 강현주라는 여인에 대해 남자로서의 마음을 갖는 순간부터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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