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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천사 - 7부
최고관리자 0 51,206 2023.03.10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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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개 그녀가 오는 날. 이미 의사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린 나는 그녀에 대한 남자로서의 욕구만이 넘실거렸다. 그녀가 오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림 속에서 어설프게 보내고, 도시락을 싸온 이양의 외면하는 눈초리를 지나 근처 백반 집에서 혼자만의 식사를 했다. 밥알을 씹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지 이유를 생각했다. 물론 그 이유는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나에게 최면이 걸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의 최면에 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지내온 내가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것은 다분히 내 행위에 대한 변명과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그런 자위마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 안의 붕괴에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담실에 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립고 두렵고 설레고 외면하고 싶은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에는 아랑곳 없이 그녀는 평소처럼 가벼운 목례를 하며 언제나처럼 소파로 와서 앉았다. 오늘은 검은 색과 흰색의 체크무늬가 엇갈린 원피스. 서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던 그녀의 육감먹인 다리가 자리에 앉으며 그 빛을 발하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그녀의 다리선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목례를 하며 나도 그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면서도 불연 듯 치솟는 내 물건의 빠른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그녀가 먼저 내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전보다 확실히 밝아진 얼굴. 더 편안해진 모습. 차분한 느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심리적 안정감이 그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의사로서의 내 마음을 또한 편안케 했다. “네. 주희씨도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맑은 정신에서는 언제나 수동적인 대화법에 머물렀던 그녀가 오늘은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바탕에 확실한 변화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주희씨 표정이 무척 밝아 보이는군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기분은 좋아요.” “그래요?” “네. 음… 선생님 얼굴을 뵈니 더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 후훗……” 이런 그녀의 반응은 처음이었다. 혹시 최면의 효과가 영향을 주고 있는 걸까?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를 대하며 잠시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그러다 결국 내친 걸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변화가 있으신 것 같은데,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지고 있었다. “제게 귀한 존재가 생겼어요.” “귀한 존재요?” “네.” “어떤?” “그 분은 바로……”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던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나의 수호천사에요.”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최면의 상태에서만 나와의 관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수호천사라뇨?” 그녀의 시선이 조금 먼 곳을 향했다. 무엇을 본다기 보다 생각하는 듯 보였다. “모르겠어요. 그냥 좋은 느낌이에요. 좋은 꿈을 꾸고 난 것 같기도 하구요. 아무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어떤 존재가 옆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 존재가 실제 하는 인물인가요? 아님 생각 속에만 있는?” “생각 속에 있는 거겠죠. 그렇지만… 어쩌면 실제 하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는 꼭 만날 것 같은……” 더 깊은 대화로 그녀의 무의식을 깨우기는 싫었다. “좋은 변화로군요. 일상 생활 중에도 우울감이 많이 줄으셨나요?” “네. 무척.” “잘됐군요. 그럼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떤?” “주희씨의 우울에 관한 원인 중에 하나가 남편분과의 소원한 관계인 것은 나도 충분히 알 것 같아요. 그런데 혹시 그 외에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어릴 적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이 무의식에 남아 때로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와 결부되면 그렇게 우울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그래서 주희씨의 과거 기억 속에 그와 비슷한 것은 없는지 궁금한 거에요.” “음……”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생각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요.” “그래요? 흠… 주희씨 형제분이 몇남 몇녀 신가요?” “저희 집은 딸만 있어요. 딸 둘이죠. 제가 맏이구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지난 번 최면 상태에서 그녀는 오빠의 존재를 이야기 했었다. 그런데 지금 맨 정신에는 남자 형제가 없다고 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처음부터 딸만 둘이셨나요? 아니면 혹시 어려서 돌아가신 분이 있다던가……” “아니요. 처음부터 딸만 둘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들어간 단호함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최면을 통해 그녀가 말했던 오빠란 인물에 대해서 확인해봐야 할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 이야기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유도를 해야 할까? “그렇군요. 그럼 동생분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실 수 있으세요?” 나는 조금 그녀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제 동생은… 탤런트에요.” “그래요?” “네.” “저는 TV를 잘 보지 않는데, 유명한 분인가요?” “아직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아요. 가끔 단역으로 나오죠. 그렇지만 잡지 모델은 꽤 많이 했어요.” “그렇군요. 언니처럼 미인이신 모양이죠?” “저보단 제 동생이 더 예뻐요.” “주희씨도 뛰어난 미인이신데 주희씨보다 더 예쁘시다면 그야말로 경국지색이겠군요.” “쿠쿡…… 재미있으시네요. 하지만 뭐 그런 정도는 아니라도 길가면 눈에 확 띄는 정도의 미인이긴 해요.” “한 번 보고 싶네요. 주희씨와 같이. 그러면 두 분의 미모를 비교해볼 수 있을 텐데요. 하하……” “음… 한 번 데려 올까요?” “와! 그러면 영광이죠. 전 아직 탤런트나 배우 분을 직접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요? 그럼 언제 데려올까요? 요샌 맡은 배역이 없어서 잠시 쉬는 것 같던데. 아마 시간은 될 거에요. 담 주 상담일에 같이 올까요?” 가벼운 농담으로 한 말에 그녀의 반응이 너무 진지했다. 그리고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동생에 대한 자랑과 편안함이 섞여있는 듯 했다. 그녀와의 상담은 그렇게 평온한 분위기에 마무리 됐다.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며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언제든 그녀와의 시간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에 아주 섭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머리 속에는 그녀의 의식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실체였다. “강주희씨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실체를 무의식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을 보인다. 그에 대한 보호욕구는 무척이나 강해서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는 전혀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최면상태에서도 그 실체로의 접근은 얼음에 봉인된 듯 희미한 그림자만 비쳐 보일 뿐이다. 이 경우 내가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은……” 녹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한다. 그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까? “그녀의 무의식을 완전히 내 의사에 복종시키는 의식의 종속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럴 경우 부수되는 육체적 종속의 문제는 향후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위험은 그녀의 무의식이 의식과 하나로 동화될 경우이다. 그 경우 무의식과 의식의 혼재로 스스로의 정체성이 재정렬될 확률이 있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실제적 혼란을 그녀의 의식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시 된다. 또 치료의 마지막 단계까지도 그녀를 정상적 의식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게 될 확률이 큰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다.” 녹음을 마치고 파일을 정리한 후 다시 생각에 빠진다. 정말 나는 어디까지 달려가게 될 것인지. 금요일 밤에 걸려온 전화에 주말과 휴일의 내 모든 일정이 뒤틀려버렸다. “박씨! 미안한데 감리 문제가 생겨서 한 2주 정도 쉬게 될 것 같아. 다시 시작하게 되면 내가 연락할 테니 당분간 인생을 좀 즐기라구. 알았지?” 토요일 아침 눈을 뜰 때까지도 나는 이틀의 휴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고개를 처박고 있을 때, 문득 한 동안 내버려두었던 나의 애마가 생각이 났다. 조금 답답하지만 그래도 넥 밴드를 하지 않으면 허전해 기어코 찾아 꺼내고, 가죽 챕스에 버닝 블레이즈 재킷을 걸쳐 입고 리딕 부츠를 꺼내 신었다. 아주 오랜만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왠지 어색했다. 현관을 나서다 말고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을 바라본다. 조금 웃기다. 차고 한쪽에 세워져 있던 녀석에게 가서 커버를 벗겨 냈다. 한동안 손질하지 않은 채로 두었지만 그래도 녀석은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다. 자리에 앉기 전, 녀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헬멧을 쓴다. 헤드 웹만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게 있어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나처럼 머리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머리란 존재는. 윈드실드를 뺄까 하다 그냥 두기로 했다. 어디까지 달려갈지 나도 모르니까. 사이드백을 열어 내용물도 확인해보고 연료의 상태도 확인해 본다. 기름은 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주유소에서 가득 채우도록 해야지. 이제 자리에 앉아 시동을 켠다. 헬멧에 올려진 고글을 내려 썼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녀석의 소리가 우렁차다. 다이나 스위치백. 이 놈이 바로 내 애마다. 녀석을 타고 하남시를 가로질러 팔당대교를 건너갔다. 양수리를 지나 북한강을 따라 느긋하게 달려가는 기분이 즐겁다. 한강 줄기를 따라 놓인 이 길은 언제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이리 저리 휘어지는 길은 지루하지 않아 좋다. 다만 물길을 따라 피어오르는 안개가 조심하라고 속삭일 뿐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오토바이는 청년시절에나 즐길 것이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무엇엔가 미치고 싶고, 달려가고 싶고, 그래서 즐겁다면 등 뒤에 붙은 위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젊음일 테니까. 그러나 두 바퀴가 주는 자유로움을 정말로 안다면 그 때는 나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친 듯 달려가지도 않을뿐더러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더욱 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겁고 안전하게 자유를 만끽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고 특히나 생활의 여유가 있다면 더욱 즐기고 싶은 유희가 오토바이가 아닐까? 영화촬영소 입구에서 길을 꺾어 들어가 왈츠와닥터만을 찾아 들어간다. 입구에 주차를 하고 저 앞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로 다가서본다. 지금 있는 강변의 자전거 도로가 없던 시절의 이곳은 더 아름답고 고즈넉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자전거 도로가 생겨 과거의 그 맛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자꾸만 인위적 포장을 하려고 하는 걸까? 인간의 편리를 위해 그 보다 더 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없애버리다니. 이것은 만행이다! 초창기에는 단층이던 집도 이제는 이층이 됐다. 박물관이 들어선 것이야 그렇다 해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조화를 이루던 아담한 집은 부담스러운 크기가 됐다. 그렇게 저렇게 세상을 따라 변해 가는 것.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이것이 운명인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 누군가 계단 입구에 서서 길을 막는다. 이건 또 뭐지? “왜 그러시죠?” “지금 중요한 촬영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립시다.” “여기 직원이신가요?” “촬영팀 스텝인데 거의 끝나가니까 조금이면 될 거요.” 이 놈의 태도가 불량하다. 이건 촬영팀이라기 보다 동네에서 막 놀던 양아치 같은 느낌이다. “얼마나 기다리면 됩니까?” “아마 대충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이보세요. 나도 마냥 시간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촬영이 딱 시간 정해 놓고 끝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테이크 아웃하면 되니까 내가 직원하고 이야기 해보죠.” 놈의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려는데 놈이 턱하니 다시 자리를 막고 손을 뻗어 내 가슴을 민다. “이것 참, 이봐요!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잖아.” 인간의 본성은 쉽게 감춰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양아치 놈들이 하는 촬영 운운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촬영도 아닐 게 분명하다. “이 손 떼시죠.” “좋게 이야기 할 때 가지.” “손 떼!” “어쭈! 싫다면?” 더 말할 필요 없다. 이 놈은 아무리 봐도 말로 해서 알아들을 놈이 아니다. 더구나 좀 두들겨 팬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는 놈이다. “좋은 말 할 때 가라. 응?” 놈이 왼손에 힘을 주어 밀어온다. 몸을 비틀며 놈의 손을 잡아 손목을 꺾어 돌리자 의외로 몸을 돌리며 오른손으로 후려쳐 온다. 반사적 반응이 싸움에 능숙한 놈이다. 어쩌면 그냥 막 굴러먹던 양아치 종류가 아니라 제법 운동을 한 전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춰 놈의 오른손을 피하며 나도 몸을 회전시켜 오른발로 놈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 묵직하게 걸린 느낌에 놈이 자빠지리라 생각했지만 놈은 이번에도 의외로 뒤로 텀블링을 하듯 한 바퀴 돌아 그 충격을 완충하고는 어느새 중심을 잡고 다리를 뻗어 내 명치를 가격해 온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비키는데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날카롭다. 이 놈 이거 제대로 배운 놈이다! 어설프게 상대할 놈이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다. 놈의 다리가 다시 제자리도 돌아가기 전에 빠르게 놈에게 다가서며 몸을 낮추고 팔꿈치로 놈의 낭심을 겨낭한 채 놈의 몸 중심을 몸으로 부딪혀간다. “허!” 놈이 짧은 소리를 뱉으며 몸의 축을 잡고 있던 다리를 굽히며 상체를 낮추고 다가서는 내 팔꿈치를 또한 두 팔꿈치로 막아 선다. 팔과 팔이 부딪히고 오히려 부딪혀간 내가 더 전진하지 못하고 한 걸음 뒤로 튕겨졌다. 팔이 저리다. 놈도 한 걸음 뒤로 발을 뻗으며 물렀다. 아직 몸의 중심을 다 잡지 못한 상태에서 놈의 눈빛이 번쩍하는 듯싶더니 이내 도약을 하려 다리를 굽힌다. 무술이 아닌 싸움에 있어서는 선방이 가장 중요한 데. 그때 “오빠!” 누군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내 팔을 잡았다. 놈도 자세를 풀고 사태를 살펴보는 듯 했다. “오빠 오지 말라니까 왜 왔어요? 어서 가요.” “가긴 어딜가?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하고 가야지.” 계단 위에서 머리를 올백으로 쓸어 넘긴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이 여자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이야기 다 끝났어요. 난 이번 작품 관심 없으니까 서로 신경 끄죠.” “너 그러다 후회한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영화 출연 못해서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커피는 잘 마셨어요. 먼저 갈게요. 가요, 오빠.” 여자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자로서는 어서 자리를 떠야 할 상황인 듯싶었다. 나는 여자의 끌림 대로 걸음을 떼어 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계단 위의 남자가 아까의 그 놈에게 눈짓을 했고 놈이 나를 보며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놈의 눈빛이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한 듯 보였다. 1:1이라면 어느 정도 해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1의 상황이라면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이 낯모르는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놈이 아닌 계단 위의 기생오라비를 흘겨보며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녀석을 붙잡아 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심리적 위협을 느끼게 해야 한다. 녀석이 움찍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싸움이 붙는다 해도 아까처럼 승부를 바로 내기 어려운 1:1의 상황이 될 것이다. 여자와 내가 나의 애마로 오는 동안 두 놈은 그저 우리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여유롭게 사이드백에서 여분의 헬멧을 꺼내 여자에게 씌워줬다. 여자는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은 두려움으로 마구 떨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척이나 태연한 듯 보이게 가장하고 있었다. 시동을 켜고 내 허리를 잡은 여자의 떨리는 손을 느끼며 나는 여유롭게 출발을 했다. 왈츠와닥터만을 벗어나며 바라본 두 놈은 서로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따라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을 달리는 동안 여자는 추위를 타듯 점점 더 떨고 있었다. 가여운 옷차림이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추운 날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놈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애마를 세운 곳은 한참을 달린 대성리역 앞에서였다.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요?” “……” 여자를 돌아봤다. 그제서야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바람에 밀려 이리리 물길을 만들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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