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악!” “뭐야! 왜 그래?” “저기……. 저기……. 저, 저기.” “어~억! 저 저~ 저게 뭐야?” 그년이 비명을 지르자 부르르 떨자, 그년의 비명에 놀란 그년 남편 역시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짧은 비명과 함께 눈을 둥그렇게 뜬다. 하긴 출근을 준비하고 있던 그년의 남편 입장에서는 뜬금없이 혀를 길게 내뽑은 채, 자신이 살고 있는 15층 아파트 창문 앞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당황스럽기도 했을 거다. “여보. 저사람 박 진호 아냐?” “으~ 으~ 으~ 하~아~ 하~아~” “정신 차려. 당신이 왜이래?” 그년은 몸을 덜덜 떨더니 결국 자리에 넘어져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는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뭐라고요? 지금 거기가 어디십니까?” “동구 범일동 A아파트 109동인데요. 우리 집 창문에 사람이 목을 맨 채 매달려있어요.” “예. 즉시 출동하겠습니다. 정신 차리시고 경찰에도 신고하세요.”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어! 저게 뭐야? 사람 아냐?” “그런 모양이네. 저기에 사람이 왜?” 출근길에 나섰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말에 의해 모두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채, 15층 높이에 매달려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까지는 싫었는데. 그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복수의 방법을 찾았지만 그년에게 망신을 주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또한 기껏 R그년에게 망신을 준 대가로, 나 역시 망신을 당하는 것 말고도 또, 나에겐 ‘사내놈이 치사하게…….’라는 수식어까지 더해질 것이니 망신을 주는 일만으로는 나에겐 밑지는 장사였다. 그렇다고 누구에겐가 청부를 하여 그년을 죽이든지, 내 손으로 산사람의 목숨을 끊고서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을 사람을 죽였다는 그 손가락질을 감당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내 스스로 죽으면서 그년의 더러운 행적을 세상에 고발하는 그것이었다. 실제 창녀의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고한 척, 순수한 척, 우아한 척하면 뒤로는 자신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맡기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던 가증스러운 년. 학창시절 한 여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 이후 여자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기대도 가지지 않은 채, 결혼조차도 ‘사랑’이란 그것이 아닌 주변의 강권과, 집안의 장손이라는 그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이란 굴레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한 나쁜 년의 더러운 꼬임에 빠져, 또 다시 처참한 배신을 당했다. 여자란 존재에 대한 무지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에. 사실 결혼 후, 아니 학창시절 나를 배신하고 떠난 혜진이와의 일 이후에 나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우연히 한 채팅사이트에서 만났던 수진이. 부천에 살고 있었던 그녀는 언제나 나에겐 천사였었고, 나 또한 남편의 외도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던 그녀에게 그녀를 항상 따스하게 품어주는 햇살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장애가 되지 못했고, 내가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그녀는 비행장 입구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고, 또 다른 어떤 날은 서로 기차를 타고 대전에서 만나 사랑을 불태웠었으니까. 5년을 불같이 사랑하던 우리는 어느 날 문득 그녀의 남편이 정신을 차렸는지 가정으로 다시 돌아와,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고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남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에 내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나 역시 그녀를 진정 사랑했기에 그녀의 앞으로의 생활이 행복하기를 빌면서 고이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진이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열병을 앓듯이 앓아누웠다가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은 나에게 여자는 없으리라 믿고 기원했다. 배신도 아팠지만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은 그 배신의 아픔과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처절한 고통이 수반되었기에 난 더 이상 내 인생에 여자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정말 어떤 여자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따금 아내이외의 성적인 욕구가 생길 때면, 채팅사이트에서 알고 지내던 가벼운 상대들과 일회성 만남으로도 그 욕구는 충분히 풀 수 있었기에, 굳이 ‘사랑’이라는 굴레로 나 자신을 속박하길 원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나와 인연을 맺었던 여자들은 내가 내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장한 냉정함이 그녀들에게 오히려 끌림으로 작용했던 모양이었다. 여자들이 혹할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도 많지도 않은 내가 여자에 궁하지 않았던 그 이유가 혹시 여자들이 ‘나쁜 남자증후군’그 현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난 그년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년이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무슨 이유로 그년에게 내 전화번호를 주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긴 정치판에서 생활하다보면 그 전화번호란 것이 별 대수로운 일이 되겠는가? 선거만 끝나면 바뀌는 전화번호들, 일만 생기면 생겨나는, 내가 가지고 다니면서도 이 명함에 적혀있는 단체가 도대체 뭐하는 단체이며, 내가 언제 가입해 있었는지도 모를 그런 단체들의 이름 아래에 선명히 찍혀있는 내 이름 석 자. 그것이 이 대한민국의 정치판 현주소인 것을……. 아무튼 이미 죽은 내가 뭐 살아있는 여자들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가? 오히려 그래도 죽기 전에는 유서일 수밖에 없는 그년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기 위한 목적으로 완성해둔 소설 아닌 소설을 A4용지에 깔끔하게 프린트해서 마치 책처럼 철까지 하고나서 이 아파트 옥상에 내 휴대폰, 지갑과 함께 가지런하게 놓아두고, 비록 죽은 시체지만 사람들에게 깔끔한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왕이면 덜 흉측하게 혀를 빼무는 모습과, 눈이 뒤집히지 않게 고통 속에서도 눈을 굳게 감고 견디는 연습을 수차례 했었는데 육체를 떠난 내 육신을 지켜본 나는 나란 인간의 나약함에 찌를 떨었다. 눈은 흰자위가 허옇게 드러난 채 까 뒤집혀 있었고, 혀는 있는 대로 쭉 뽑혀서 축 늘어져 있었고, 거기까지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망신스럽게도 그 순간의 고통을 참지 못해서인지 내 깨끗하게 다려 입은 바지가 축축해져 망신스러운 모습으로 있었다. 쪽팔리게…….ㅠㅠ 난 사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 조금 더 치열하게 살고 싶었다. 멀쩡하게 아내가 있고, 딸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들 보다는 멍청하게도 한 가증스러운 년의 말과 행동에 속아 내 모든 것을,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든 그 죄책감과 내가 보였던 그 어리석음으로 인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꼭 그년의 죄에 대한 응징을 해야겠다는 그 마음이 내 오늘의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난 죽었다. 악연의 시작 그년과의 인연은 그년의 전화 한통에서 시작되었다. “박 비서님 오늘 사무실에 가세요?” “예. 지금 가는 도중입니다.” “저 지금 양정에 있는데 아직 양정 안 지났으면 사무실까지 좀 태워주실래요?” “예. 한 십 분이면 양정에 도착합니다. 지금 계신 곳은 어디십니까?” “양정 소방서 옆에 친구들이랑 커피숍에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연제구청 지나면서 전화를 드릴 테니까 그때 준비해서 나와 계세요.” “네.” ‘이 여자가 뭐 친하다고 전화를 했지?’하는 생각보다는 ‘평소 전화는커녕 농담조차 제대로 하며 지낸 사이도 아닌데 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하는 그것이 더 황당했다. 아무튼 약속은 했으니 연제구청을 지나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양정소방서를 지나치고 나서 100여 미터를 더 갔음에도 이 여자가 보이질 않는다. “여사님 어디에 계십니까?” “박 비서님은요?” “양정소방서를 지나서도 안 계시기에 다시 구청 쪽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바로 나가있을게요.” 그년과의 통화를 끝내고 난 비상등을 켠 채, 연제구청에서 다시 양정소방서로 향했다. 저 앞에 그년이 보였다. 그리고 그년의 친구인 듯한 두 여자가……. “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날씨도 쌀쌀한데 차 안에 있는 제가 기다리는 게 옳죠.” “여긴 제 친구들이에요.” “예, 반갑습니다. 박 진호라고 합니다.” “예. 전 진경이구요. 이 친구는 정애라고 해요.” “예. 세 분 오늘 좋은 일 있으셨나 봅니다.” “아뇨.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커피나 마시러 나온 거예요.” “아. 예.” 별 중요하지도 않은 잡담 속에 사무실이 가까워졌다. “저희는 여기 좀 내려주세요. 마트에 들러 시장 좀 보고 가게요.” “예. 그럼 잘 들어가세요.” 세 여자의 수다에서 벗어나 차를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 바쁜 일이 없고, 또 누군가 있어봐야 걸리적거리는 일 밖에 없기에 당분간 사무실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당직자들에게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기에 사무실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지은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만큼은 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겠지만……. “바쁘세요?” “댁에 가시지 않고요?” “집에 가도 특별히 할 일도 없어요.” “예.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아뇨. 제가 타드릴게요.” “아뇨 그냥 앉아계세요.” 내가 종이컵을 내밀자 그녀는 다소곳이 커피를 받아든다. “고맙습니다.” “뭘요.” “박 비서님은 매일 출근 하세요?”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사무실에서 혼자 노는 거죠.” “심심하시겠다.” “전혀요. 전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 잘 놉니다.” “이따금 놀러 와도 되나요?” “예.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정말요?” “예. 당원이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오신다는데 당연히 환영할 일이죠.” “제가 놀러오면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죠.” “방해랄 게 뭐 있겠습니까. 걱정 마시고 언제든 오세요.” 커피를 마시고 조금 더 잡담을 나누다가 그녀가 일어선다. 그러더니 시장바구니에서 빵과 티백에 든 음료를 꺼낸다. “박 비서님 커피 몸에 좋지 않거든요. 커피 대신에 이걸 타 드세요. 그리고 이 빵은 따님 주시고요.” “아이고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냥 댁에 가져가서 드세요.” “아니요. 아까 태워주신 거 고마워서 그래요.” 실랑이 끝에 결국 그년은 빵과 티백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장바구니가 무거워 보인다. “댁이 어디세요?” “A 아파트요.” “그거 들고 가시기 무거우실 텐데 제가 태워드릴까요?” “정말요?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죠.” 그년은 나를 보고 생긋 웃더니 앞장서 사무실 계단을 내려갔다. 나 역시 뭔가에 홀린 듯 그년의 뒤를 따르고, 그년이 살고 있다는 A 아파트로 가 그년을 내려다 주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다시 가셨어요?” “예.” “심심하시겠다.” “별로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 잘 놉니다.” “저 진짜 이따금 놀러 가도 되죠.” “예. 언제든지요.”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그년은 내게 전화를 걸었고, 또 별 영양가 없는 말들만 계속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날 그년의 차를 태워달라는 그 말을 냉정하게 거절했어야 했었는데……. 하긴 누가 그 시점에서 그년이 나를 죽게 만들 원흉인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Hi~’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톡이 울려 이 시간에 누굴까 하고 열었더니 그년이 이모티콘을 날린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벌써 일어나셨네요?’ ‘항상 일어나는 시간이니까요. 그런데 아침부터 톡을 하시면 서방님 삐지실 건데요.’ ‘남편 운동 갔어요.’ ‘아. 부지런한 분이시네요.’ ‘오늘은 뭐 하세요?’ ‘저야 항상 똑 같은 일과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럼 낮에 시간 있음 놀러 갈게요.’ ‘예. 오늘도 즐겁게 보내세요.’ ‘놀러 간다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톡이 끝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한 후, 출근을 준비했다. 대선에서 패한 후 지역위원회 사무실은 할 일이 없었다. 의욕 또한 없었겠지만……. 아무튼 그년은 낮 시간에 사무실에 오지를 않았다. 저녁 즈음에 ‘죄송해요. 친구들과 만나느라…….’라는 톡 메시지를 끝으로. 어차피 그년이 오든, 않든 내게는 무관한 일이었다. 당원이 사무실을 찾으면 커피나 대접하고 말 상대만 해주면 되는 일이니 원래 내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튿날 아침 그년은 또 6시가 조금 지나자 톡을 보내온다. ‘Hi~’ ‘예. 오늘도 즐거운 하루 만드세요.’ 그년의 톡은 매일 아침 나를 깨우는 알람이 되었다. 어떤 날은 시간이 되어도 톡 알림이 울리지 않으면 연신 톡을 기다릴 정도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항상 그러했듯이 아침에 텅 빈, 사무실에 출근해서 뜨거운 커피를 마신 후, 컴퓨터 앞에 주저앉아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심심하면 웹서핑도 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도 다운받아 CD로 구워서 이것은 누구에게 줄까 고민하기도 하면서 그런 평온한 나날들이. ‘사무실이에요? “ “예. 사무실입니다.” 뜬금없이 전화를 하고선 내가 사무실이란 말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10여분이 흐르자 사무실 문이 열리고 그년이 들어선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그냥요.”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예.” “저녁시간이 다 되었는데 서방님 저녁은 준비해놓고 나오셨나요?” “신랑 시골 갔어요.” “같이 안가시고요?” “같이 가봐야 친구들하고 논다고 정신없는데 거길 왜 따라가요.” “애들은요?” “하나는 서울에 있고, 하나는 고등학생이에요.” “예.” “오늘 바람 좀 쐬게 차 좀 태워주세요.” “어디 가실 곳이라도?” “그게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요.” “아~ 예. 그럼 바다구경 가실래요?” “좋죠.” 대충 사무실에서 해야 할 잔무를 처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겨울 송정해변은 황량함 그것이었다. 하긴 접근성에서 광안리나 해운대에 비교해서 떨어지니 당연히 황량할 밖에……. 난 내 지정석인 46번 자리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차에 남겨둔 채, 커피데크로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아메리카노 연한 것 한잔하고, 보통 한잔요.” 커피를 주문한 후, 진열되어있는 과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조수석 문을 발로 툭툭 차니 그년이 문을 열고 커피를 받는다. “고마워요. 분위기 좋네요.” “예. 부산 바다 중에는 송정이 가장 좋아요. 특히 겨울바다는.” “그런데 박 비서님 정말 애인 없어요?” “당연하죠. 어떤 여자가 저 같은 사내를 좋아라하겠습니까?” “......” “저 맥주 한 캔만 사주실래요?” “예.”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년이 뜬금없이 맥주를 찾는다. 난 그 말에 차를 뽑아 편의점 앞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맥주 하나와 안주가 될 만한 과자를 골랐다. 초면(?)에 오징어나 쥐포 등을 안주로 하여 뜯기에는 그년의 입장에선 난감할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난, 그년은 나를 보며 쌩긋 웃었다. “추하진 않죠?” “맥주 드시는 게 추할 일이 뭐 있나요?” “여자가 혼자 청승맞잖아요.” “전혀요. 그냥 편안하게 드세요. 제가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대작이라도 해드렸을 텐데.” “고마워요. 나이가 마흔이 넘고 나니까 사는 게 허무하고 그래요.” “그럼 애인이라도 만드셔서 삶에 활력을 찾아보시지요.” “애인을 아무나 만들 수 있나요?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되지.” “아이고 여사님 정도면 충분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꼭 외모만 가지고 평가하는 게 옳은 것은 아니지만 여사님 정도면 남자들 줄을 설걸요?” “고마워요. 그런데 박 비서님은 왜 애인 안 만드세요.” “대충 아시겠지만 애인 만들 능력도 없고, 또 정치판에서 여자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면 그걸로 게임아웃이잖아요.” 밤바다에 인적이 드물어지고 밤이 깊어진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가까이 되었다. “이제 들어가셔야죠. 벌써 11시인데.” “예.” 그년을 태우고 송정을 나와 광안대교에 차를 올렸다. 광안대교의 야경을 보며 그년이 탄성을 내뱉는다. “와~ 정말 예쁘네요.” 황령터널을 지나 그년이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니 그년이 살고 있는 109동 입구까지 가주길 원했다. 솔직히 아파트 경비원의 눈에 뜨여 좋을 일이 없는데……. 아무튼 그년의 요구에 따라 그년을 입구에 내려주고 난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박 비서님 오늘 고마웠어요.’ ‘예. 여사님 저도 즐거웠습니다. 편한 밤 되세요.’ 신호를 받아 대기 중 그년에게서 톡 메시지를 받고 대답을 해주었다. ‘Hi~’ 그년이 보낸 톡 알림 소리에 눈을 떴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예. 그런데 서방님 전화는 오지 않았던가요?’ ‘신랑은 시골가면 항상 술 때문에 뻗어요.’ ‘아, 예. 아무튼 주말 잘 보내세요.’ ‘예. 그런데 박 비서님은 제가 싫으신 모양이네요.’ ‘싫을 일이 뭐 있습니까.’ ‘피~ 그런데 톡만 하면 금방 끝내려고 그러세요?’ ‘그냥 특별히 제가 여사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그렇잖아요.’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를 나열하다가 톡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집사람과 딸은 주말이라 처가에 가 있기에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집을 나와야 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사무실로 올라갔다. “형님 아침에 웬일이세요? 제가 전화를 드릴 테니 끊으세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선배의 가벼운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자신이 전화를 건다고 한다. 이 후배는 내가 개인적인 일로 심심찮게 신세를 지는 후배다. 한때는 태권도 사범으로 세계를 휘젓고 다니다가 국내에 정착해서 지금은 수도권의 대형 입시학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후배, 참 순수하고 성실한 후배이다. “응. 그동안 잘 지냈어?” “예. 형님 덕분에요.”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당신 덕분에 잘 지내지 어떻게 당신이 내 덕분이여.” “무슨 그런 말씀을요. 그런데 아침에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갑자기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혹시 어려운 일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저도 지금은 형편이 좀 좋지 않아 큰돈은 안 되겠지만 얼마간은 돌려드릴 수 있어요.” “이 사람아 돈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야. 그냥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라니까.” “예. 아무튼 형수님과 진영이도 잘 지내죠?” “응. 어차피 집사람이야 항상 그렇고, 진영이도 학생인데 특별할 일이 있냐.” “다행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집에는 다녀온 거야?” “아직 신입이라서 명절 때 못 가뵈고 조만간 휴가내서 부모님 찾아뵈려고요.” “그려. 하긴 당신이야 그런 일은 알아서 잘 하니까.” “형님 언제 서울 한번 올라오실 일 없으세요?” “지금 당장은 계획이 없는데.” “예. 저도 형님 뵈러 부산에 가야하는데 묶인 몸이라 쉽지가 않네요.” “일단 돈 벌기로 했으면 열심히 돈을 벌어서 모아. 그래야 당신이 원하는 일도 추진할 수 있으니까.” “예. 형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청배와 전화통화를 마치고. 이왕후배에게 전화를 한 상황이라 또 다른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이 시간은 그 친구에게는 이른 시간이지만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다. 한참을 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긴 이 시간이면 그 후배는 한 밤중일 테니까. “진호 형, 전화 하셨네요?” “응 일찍 일어났네? ㅋㅋ” “예. 형 전화소리에.” “아 미안해. 오랜만에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안 받기에 끊었지.”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고요?” “응 그냥 건 거여. 장사는 잘돼?” “장사야 직원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제가 뭘 아나요?” “문디. 오너가 그렇게 얘기하면 직원들이 좋아하나?” “형 우리 가게는 국내에 몇 개 없는, 노동인권 자율매장입니다. ㅋㅋ” “아무튼 당신 가게에 있는 직원들은 살판이 났긴 나겠다.” “ㅋㅋ” “제수씨 바가지 안 긁어?” “답답하면 자기가 가게 나올 건데, 집에 있는 거 보면 별로 불만이 없는 거겠죠.” “여하튼 두 사람 모두다 재주는 좋아. 그렇게 해도 가게 끄떡없는 거 보면.” “직원들이 열심히 잘 해요.” “그려. 그것도 당신 복이다.” 사실 내 인생에 이 두 명의 후배는 뒤늦게 만난 인연이지만 참 복 받은 만남이다. 별 볼일 없는 나란 존재의 실체를 모두 파악하고, 또 정치판과 완전히 이별한 지금까지도 끝없이 나를 걱정해주고, 이따금 내가 담뱃값이 떨어졌을까봐 그걸 챙겨주려고 하는 후배들, 이런 후배를 가질 수 있음이 내 삶이 복 받은 삶이란 증거이리라. 후배들과 통화를 마치고 컴퓨터를 열었다.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은 메일함에 참 많은 메일들이 쌓여있었다. 대통령선거에 패배한 이후 아예 한동안은 모든 일과를 중단한 채, 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허망하게 시간을 보낸 증거였다. 메일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늦었지만 답장이 필요한 메일들은 일일이 답장을 하고, 또 필요 없는 메일들은 삭제를 해가면서 메일함을 정리해나갔다. 메일 정리를 마치고 SNS계정들 역시 챙기기 시작했다. 격려성 쪽지도 많았지만 실제 대통령후보캠프도 아닌 우리에게 퍼붓는 욕들도 만만찮게 많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청년유권자들을 탓할 수 있는 그런 선거도 아니었다. 76%에 육박하는 투표율은 그동안 젊은 청년들의 투표참여율이 낮아서 선거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우리당의 그 변명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고, 투표일 직전 대통령후보 캠프에서 투표율 70%만 넘기면 압승이 가능하다고 한 후보자 캠프의 오만의 결과였으니 말이다.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온라인상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챙기면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오늘따라 전화도 조용했다. 따분한 마음에 스피커 볼륨을 잔뜩 올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냥 노래방에 가면 부를 줄 아는, 가시를 외울 수 있는 몇 곡 되지 않는 노래 중 가장 청승맞은 노래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목청껏 불렀다. “와~ 박 비서님 노래 잘 부르시네요.” “어! 어서 오세요.” 난 후다닥 스피커 볼륨을 줄이고 창피함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그년을 맞았다. 참 황당한 일이다. 그 수많은 시간 중에 왜 하필 혼자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이 시간에 사무실을 찾은 건지…….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박 비서님하고 점심이나 먹으려고요.” “예. 하필이면 왜 저 같은 사람하고요. 이왕이면 멋있고 돈 많은 사내를 찾으셔야죠.” “박 비서님이 어때서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얼굴 안 생겼죠. 돈 없죠. 거기다 키 작죠. 그것도 모자라 성질마저 지랄 맞죠. ㅋㅋ” “밥 한 끼 먹는데 그런 조건들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예. 그러시다면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ㅎㅎ” “뭐 좋아하세요?” “안 먹는 거 빼곤 다 잘 먹습니다.” “회 좋아하세요?” “예. 잘 먹습니다.” 결국 사무실 옆의 횟집으로 갔다. 여자 당원과 단 둘이서 밥을 먹기가 조금은 껄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점심을 먹기 위해 멀리 나간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에 그냥 그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하긴 평소에 밥 한 끼 먹기 위해 횟집을 찾을 일은 없었으니 고맙게 먹을 일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와 한동안 떠들다가 그년은 사무실을 나서고, 난 마치지 않은 업무를 정리했다. 그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퇴근. 그렇게 나의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