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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이별 여행[단편]
야설닷컴 0 35,294 2023.12.13 01:32

야설:


이별 여행



사랑하는 당신!

여름휴가도 다 지난 이 가을에 웬 여행이냐며 선한 눈망울을 깜박이던 당신. 그런 당신을 지켜보면서 저는 고향에서 키우던 황소를 생각했습니다.

우습지요? 그 상황에서 당신보다 서너 배나 더 큰 황소의 눈동자가 겹쳐지다니…… 굳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찾자면 우직함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하고, 맹목적인 충성 외에 결코 배신을 꿈꾸지 않는, 그런 우직함이 당신에게도 있지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듯 당신은 저와 연애를 하면서도 이렇다 저렇다, 감정을 표현하는 법이 드물었지요. 애살 없는 당신에게 길들여지기까지 수많은 눈물을 흘리며 참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 것 같은데, 당신의 가슴에 담겨진 잔정의 깊이를 헤아릴 것 같은데……

당신은 이번 여행지로 제 고향인 전라도를 택했지요. 사실, 저는 망설였습니다. 강원도나 하다못해 충청도 어디쯤으로 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에 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강진의 다산 초당은 저 역시 처음이었습니다.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고즈넉한 풍경이 잊혀지지 않네요. 서걱거리던 갈대와 평온한 해안선, 야트막한 산들의 긴 행렬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왜 이렇게 조용한지, 왜 이렇게 한가한지…… 순간 저는 분노에 가까운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당신은 부르르 떨고 있는 제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지요. 그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의 듬직한 손을 잡은 채 백련사 고갯길도 거닐어보고, 갈대밭에서 기념사진도 찍었지요.



사랑하는 당신!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숙소를 정할 때, 저는 수줍은 소녀로 돌아가 괜히 당신의 꽁무니만 쫓았습니다. 당신과 처음 갖는 잠자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허름하지도, 그렇다고 정갈하지도 않은 여관에서 우리는 함께 샤워를 했지요. 딱 벌어진 어깨, 근육질로 단련된 가슴, 팽팽한 종아리가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신의 알몸 구석구석에 비누 거품을 묻히면서 저는 다짐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하나뿐인 내 마음의 남편’이라고……

그런 저에게 당신은 장난처럼 물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죽어도 안 된다더니, 너무 황송해서 믿기지 않아! 혹시 불순한 음모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저는 그만 비누를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엉겁결에 줍는다는 것이 계속 헛손질만 하고, 어쩌지 못해 안달하는 저를 대신해 당신이 비누를 들었지요.

[진짜인가 본데…… 나, 안 할 거야!]

그렇게 심통 부리는 당신이 고마웠습니다. 저의 작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당신이 목매이도록 고마웠습니다.

[아냐, 처음이라서…… 왜 그래? 부끄럽게……!]

당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통과 의례를 겨우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저는 순한 양과 샤워를 한 셈입니다. 불끈 치솟아 있는 성기와는 별도로 당신의 손과 눈은 한 순간도 음흉하지 않았지요.


사랑하는 당신!

첫날밤의 순결한 의식을 신성하게 지켜준 당신께 늦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당신, 진정 감사합니다.

당신의 묵직한 성기가 아랫도리에 파고들던 순간, 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습니다. 태어나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제 몸의 일부가 산산조각 찢겨지는 느낌이었지요.

이를 앙다물고 당신에게 매달렸습니다.

서서히 움직이는 당신의 허리를 따라 저는 난파당한 뱃사람처럼 이리저리 표류했습니다. 잔물결이 일렁이더니, 때로는 큰 파도가 휩쓸려 왔지요.

숨쉬기 힘들 정도로 격심한 통증이 아랫도리에 번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허우적거렸나 봅니다.

그러나 육신의 아픔과는 달리 가슴은 벅차오르는 희열로 가득했습니다.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기쁨에 저는 그만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런 제 눈물마저 혀를 내밀어 삼켰지요.

[많이 아파……? 조그만 더 참아!]

[참을 수 있어…… 나, 당신의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기뻐!]

목이 말랐는지 저는 당신의 입술을 갈구했지요.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부드러운 혀를 제 목구멍 깊숙이 말아 넣고 싶었습니다.

제 아랫도리를 들락거리던 당신의 성기가 힘껏 부푸는 듯했습니다. 여린 제 속살이 어떻게 감지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정액을 체내에 흡수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예상외로 강했나 봅니다.

제 치골을 압박하는 당신의 허리 놀림이 둔탁하고 빨라졌습니다. 당신은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쓸어내며 고삐를 더욱 당겼지요.



사랑하는 당신!

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당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분출을 앞둔 당신의 엉덩이에 몇 겹의 힘줄이 새로 돋아나고, 저는 재빨리 손을 뻗어 이탈을 제지했습니다.

[못 참겠어! 나올 것 같아…… 빼야 해!]

내부를 콕콕 찌르는 당신의 성기를 질 속에 영원히 가둬놓을 수만 있다면……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 당신에게 애원했나 봅니다.

[안에 해줘! 안에…… 제발, 내가 원해!]

당신이 뿜어낸 정액이 자궁까지 밀려오고, 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억세게 당신을 안았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신이 내려오고, 저는 한동안 꼼짝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주르륵 흘러내린 정액 사이로 언뜻 붉은 선혈이 보였습니다. 농사일을 거들며, 혹은 학원 강의를 하며 혹시라도 처녀막이 찢어졌으면 어쩌나 고민도 했었는데…… 다행히 무사하더군요.

당신이 처녀 여부를 의심할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제 마지막 선물을 온전하게 보여줄 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을 따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당신의 분신이 제 자궁에 제대로 착상됐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단 한번의 관계로 종종 임신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제가 그에 해당되기를 기도합니다.

[미안해! 너무 흥분해서 그만……]

[괜찮아…… 내가 원한 결과야!]



사랑하는 당신!

이튿날, 기분 나쁘게 쑤셔대는 아랫배를 움켜쥐면서 당신과 다시 한번 뜨겁게 맺어지려고 했던 건, 순전히 당신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거시기…… 나중에 결혼하면 코피 깨나 흘리게 생겼어…… 미리 보약이라도 먹어둬야지!]

당신은 생글거리며 저를 가만히 끌어안기만 했지요. 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당신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사타구니 부근을 어루만졌습니다.

팬티 위로 느껴지던 당신의 우람한 남근……

그 때 저는 망설이는 당신을 어떻게든 제 몸 속으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느껴야 했습니다. 첫 정을 주는 것으로 끝내기엔 당신과의 지난 세월이 너무 허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더듬는 것으로, 지난밤의 격렬한 정사를 추억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후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구례와 남원을 빙그르 돌아 귀경하는 길에서 당신은 제게 손가락을 걸며 약속 아닌 다짐을 했지요!

[다음엔 반드시 날 잡아서 양가 어른들 뵈러 가자!]



사랑하는 당신!

저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차 안을 맴돌던 당신과의 언약을 지킬 수 없습니다.

모르지요? 은행원인 당신이 요술을 부려 예금주의 통장에서 몇 억 원을 빼낼 수 있다면…… 은행에 산더미 같이 쌓인 그 많은 돈의 일부만 훔쳐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또 모르겠네요!

사실, 귀경하는 내내 이 말을 하지 않으려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모릅니다.

[4억이면 되는데…… 내 몸값 4억만 있으면 되는데……]

자취방에 돌아와 보니 아랫입술의 살갗이 벗겨져 핏물이 맺혀 있더군요.

물론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제 한 몸 살자고 당신을 범죄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이나 저나 서로 비슷한 처지에, 가진 사람들의 껌 값에 불과한 4억 원은 결코 넘볼 수 있는 액수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그 4억 원에 당신을 떠납니다.

미안하다는 말, 미안해서 못했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 떠나는 저를, 부디 원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처럼 훌훌 털고, 앞만 보고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추호의 망설임 없이 저처럼 재수 없는 년을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당신!

예전에 말씀드렸다 시피 저는 전라도 농부의 딸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아버지는 수박, 고추, 토마토, 딸기, 양파 등으로 작물을 변경했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벼농사 하나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드니까요.

제가 대학을 휴학하고 학원 강사로 나선 건, 아버지의 파프리카 농사 때문입니다. 일본 수출에 제 값 이상을 받을 수 있다며, 시설 하우스를 크게 증축했습니다.

헛바람을 심어준 군청 직원을 나무랄 수 없는 일이지요. 그게 어디 일개 공무원의 잘못된 권유 때문이겠습니까?

작년에 남부 지방을 강타한 태풍과 잇따른 병충해로 아버지의 파프리카 농사는 도산했습니다. 빚더미에 내몰린 집안을 돕고자 큰 오빠가 피라미드 영업에 손을 댄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일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큰 오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전과자로 낙인찍힐 딱지만 남겼으니까요!

큰 오빠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농사를 도와주느라 학업의 뜻을 일찍 접었지요. 대신 제법 영민했던 두 동생들의 학비를 대느라 공고를 졸업하자마자 중소기업에 뛰어들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요.

일주일, 아니 정확하게 6일이 지나면 저는 큰 오빠가 몸담고 있는 그 중소기업의 사장과 결혼합니다. 서른아홉 살의 이혼남이라고 하더군요. 결혼 지참금으로 쓸모없는 제 몸뚱어리만 있으면 된다니, 더구나 저희 집의 빛을 모두 갚아주겠다니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겠지요.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는 당신의 위안을, 감히 욕심을 부려서라도 듣고 싶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일망정 당신이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우습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저와 통하는 구석이 있어 다행입니다. 띠 동갑이니 말이죠.



사랑하는 당신!

듣기 싫겠지만, 저희 집안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파프리카 농사로 짊어진 농가 부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음독자살을 기도했지요.

다행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는데, 시커멓게 타 들어간 식도며 위장이 남은 식구들의 가슴에도 커다란 상처를 새겼습니다.

바로 그 무렵, 사방팔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던 큰 오빠에게 일주일 뒤의 남편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평소부터 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나요! 몇 차례 스치듯 만난 것이 전부라 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인데 말이죠.

한 달 전, 술에 취한 큰 오빠의 전화를 받고 한참 동안 서럽게 울었습니다.

[미안하다! 오빠가 못나서…… 조금 전에 한 얘기는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나도 사장 놈의 새끼 멱살을 잡고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그렇게 밤새 울었나 봅니다. 눈이 퉁퉁 부어 학원마저 결근했지요. 당신도 그날 기억나시죠? 출근하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삼십 분 가까이 악담을 퍼붓던 그날……

경상도 남자답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당신!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있었기에, 당신을 제 첫 남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늘 꺼내볼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있었기에, 저는 감지덕지하며 돈에 팔려 갑니다.

당신의 순박한 영혼이 저와 함께 있기에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일망정 기꺼이 견딜 수 있습니다.

당신, 참으로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수조원에 이르는 농가 부채, 우루과이 라운드의 체결, 멕시코 칸쿤에서의 한국 농민 자살, 칠레와의 FTA 협정…… 농부의 딸이면서도 이 모든 게 저와 무관한 줄 알았습니다. 남의 나라 얘기로만 치부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무능 탓이라고, 큰 오빠의 실수 탓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야 수긍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죽기보다 싫은 제 선택이 덜 억울해지니까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적 장벽보다 더 두터운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야 기막힌 현실이 이해되니까요!



사랑하는 당신!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이 제 자궁 속에 자랐으면 합니다. 훗날 당신의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한 이별 여행…… 제 가슴 속에 앨범을 만들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장 한 장 꺼내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관련된 어떠한 추억의 끈도 붙들지 마세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탐내 가난한 애인을 헌신짝처럼 차버린 심순애라고, 돈에 환장해 눈이 뒤집힌 년이라고, 뒤돌아서서 침 한 번 뱉는 것으로 이 독한 년을 잊어주세요!



사랑하는 당신!

창 밖으로 희미하게 동이 트고 있습니다. 저 창 밖의 해를 끄집어 내릴 수만 있다면, 고향 가는 발걸음을 무작정 연기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의 어깨에 기대 사십 년만, 아니 삼십 년만, 아니 단 일 년만이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 창 밖에 걸려 있는 태양이 기지개를 켰으면……



사랑하는 당신!

표현하지 않는 당신의 사랑에 늘 투정부리던 저였습니다. 그리고 속 좁은 여자 마음을 잘 이해해주던 당신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당신에게 보채기만 했지 저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던 것 같습니다.

보내지 못할 편지라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넋두리를 주절거리는지…… 아마도 당신은 짐작하겠지요!

당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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