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 사는 50대 중반 대기업 간부입니다.
제 아내는 50세로 꽤 미인이죠.
지금부터 21년 전 사건 이야깁니다.
우리는 지금은 섹스에 서로가 불만이 없는 편이나 아내는 아이 둘 낳을 때까지는 섹스를 조금은
싫어하는 편이었으나 서로 의무 방어전 수준의 섹스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이야기하는 사건이 있고 난 뒤부터는 섹스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스타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1975년 결혼을 해서 76년과 78년에 이년 터울로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내리 4년을 전혀 태기가 없었습니다.
우리집안 어른들이나 처가에서 아들 낳으라고 성화인데 도대체가 임신이 안 되는걸 방법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1982년2월에 직장이 인사이동이 되어 일본 동경지사에 1년 간 근무계획으로 단신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3월에 큰딸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관계로 같이 못 가고 혼자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임 후 처음에는 매일 아내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도
시들해져서 일주일에 한번정도..
보름에 한번정도...
그도 어쩌다보면 하지도 못하고 업무에 시달리고 아내는 무슨 일인지 전화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아내의 전화를 기다려지는 것도 아닌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물론 한 달에 한번정도는 집에 다녀갔죠.
저도 미지의 세계인 일본생활의 재미에 젖어 점점 집을 잊어가고 있었죠.
그동안 집안 어른들은 아들타령이 계속 되었나 봅니다.
6월 초순에 집에 다니러 와서 밤에 아내와 회포를 풀고 나서는 아내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친정엄마가 아들을 점지하는 용한 절을 찾아가서 100일 축원을 올리자고 하는데 어떡해요?라고
(저희 장모님은 독실한 불교신도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싫다고 ...
하지 마하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장모님이 오셔서
자네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거기는 나이 많으신 노스님이 계신 곳 이어서 괜찮네.
그리고 100일동안 내가 같이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 말게. 아이들은 우리 집에(처가) 대려다
놓을 거니 조금도 걱정말고 자네는 일본에서 일이나 열심히 하게하며 회유를 했습니다.
일본 가서 생각해 볼 테니 좀 시간을 주세요라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을 와서 며칠을 고민을 했습니다.
절에 가서 축원을 드린다고 아들 낳는다는 보장도 없을 뿐 아니라......
만약 땡땡이 중놈이 건드리면 어쩌나........
그러다가 저녁에 일본현지 직원과 저녁을 먹으면서 그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본직원은 반색을 하면서 일본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하며 그런 식으로 축원을
많이 한다며 물론 아들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 낳는 거지만 우리 부모님의 성화도 있다 하니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한번쯤 시도하여 봄직 하다며 부추기었습니다.
그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마음에 혼란이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 장모님께서 일본 숙소로 전화를 했습니다.
김 서방 허락을 하게나! 소요되는 비용은 아들 못 낳는 달둔 내가 부담 할 터이니 그렇게 하세하시며
거의 눈물로 호소를 하시기에 <밑져야 본전이다.> 하는 마음에 마지못하여 승낙하는 척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 저는 장모님 보호아래 아내를 100일기도에 보내는 걸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100일기도 끝 날 때까진 서울을 가지 않기로 마음의 작정을 하고 안 갔습니다.
그 이후 아내는 7월 15일부터 절에 들어가서 10월22일 나온다 했습니다.
그 절은 강원도 오대산 자락에 있는 조그만 암자며 언제인가는 저도 아내와 한번 가본 암자였습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약 2시간 정도 걸어서 들어가는 산세가 수려한 곳이었고 속세와는 전혀
연결이 안 되는 때묻지 않은 작지만 아담하고 멋진 곳입니다.(암자이름은 안 밝힙니다)
50대 중반의 스님 한 분 만 살고 있었습니다.
밑에 마을에서 매일 공양을 준비해주는 아줌마가 올라올 뿐 거의 인적이 없는 그런 암자였습니다.
그리고 100일이 흘렀고 그동안 장모님은 당초 약속과는 달리 서울 집으로 가버렸고 아내는
그 암자에서 득남 100일 축원기도를 열심히 경건한 마음으로 올렸다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입니다.
그 후 83년 4월 저는 본사로 다시 들어왔고 83년 6월 임신을 해서 막내아들을 낳았습니다.
장모님은 그 절에서 100일기도한 덕분이라고 좋아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장모님 돌아가셨고 우리도 중년이 되었습니다.
자주는 못하지만 주1회 정도는 섹스를 즐깁니다.
가끔은 아내에게 묻습니다.
나말고 다른 남자랑 섹스 해 본일 있냐?물론 그건 잘못을 따지자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전혀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예전에 가서 생활했던 그 암자를 갔었는데 (등산 겸해서) 그 암자의 스님이 바뀌었습디다.
전에 계시던 그 스님(살아 계시면 70중반이겠죠)은 지난 봄에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날 밤 집에 돌아와서 아내는 20년 전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절에 가는걸 허락 받고 난 뒤 친정 엄마와 함께 준비를 했었습니다.
먹물 옷(바지저고리), 속옷 등을 준비하려했는데 친정 엄마께서 절에서는 꽉 조이는 옷 종류는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브래지어와 삼각팬티는 준비를 안하고 헐렁한 런닝셔츠와 트렁크팬티를 준비했습니다.
처음 암자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만 하고, 공양준비 해주던 아줌마도 우리가 간 뒤로는 올라오지
않아서 저와 친정 엄마가 공양을 준비하고 빨래를 하는 등 살림을 다 살았습니다.
둘째 날 저녁에 스님은 제게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스님은 제게 이것저것 부부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만 부끄러워 제대로 이야기를 못했습니다.
스님과는 다른 방에서 친정 엄마와 같이 잠을 잤는데 친정 엄마는 1주일정도 있다가 집이
걱정된다며 스님에게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고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제가 하산 할 때까지 친정 엄마는 단 한번도 암자에 오지 않았답니다.
친정 엄마가 서울 가신 뒤 방에서 혼자자기가 무서워 잠이 안 들고 있는데 스님이 자기 방으로
오라해서 그 방에서 같이 잤습니다만 몸은 건드리지 않았고 또 건드리지 많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기도는 낮에는 암자 위에 있는 동굴 속에서 하고 밤에는 암자에서 하곤 했답니다.
며칠동안 같이 생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