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입에서 이렇게 음란한 단어가 나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평범하게 살림을 사는 가정 주부의 입에서.....
김씨 제 보지 불타요 어서 어떻게 해 주세요라는 말이.....
지금 생각해도 낮이 뜨거워 얼굴을 차마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기 조차도 민망합니다.
어떻게 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저 자신이 지금도 그렇게 밉고 원망스러운지.........
뱉은 말 도로 담을 수도 없고 또 없던 일로는 더 더구나 할 수가 없기에 어찌 하여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입장 더구나 대학에 다니는 딸을 두고 있는 중년의 주부로서.....
한심스럽고 기가 찬 저의 그 말이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할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제 인생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찌 그렇게 음란한 말이 나왔는지....
생각만 하여도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모르죠.
저에게도 본성이 음란한 기질이 있었는지......
아니 지금 꼼꼼하게 생각하니 저도 음란한 기질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17살인가....
하여간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안 나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 전 즉 중학교 다니면서 나쁜 아이들과 친구로 사귀면서 자위를 배웠고 야한 비디오도 보았습니다.
처녀를 깨트리면 무척 아픈 통증이 따른다는 친구들의 말에 저는 제 처녀를 깨는 것은 무척 자제하였습니다.
제 나쁜 친구들이 같은 여자끼리 벌거숭이로 서로 끌어안고 보지와 보지를 비비는 맷돌놀이를 즐겨도
저는 그 것을 웃으며 지켜 볼 뿐 적극적으로 참여는 안 하고 옆에서 그저 친구의 가슴만 주물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보지에서는 많은 양의 물이 나오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제 처녀를 누구에게 막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아빠만 보면 제 처녀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빠라는 넘지 못할 장벽이 저의 그런 생각을 곳 엄마라는 존재를 생각하게 하였고
그 것은 그런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고맙고도 고마운 역할을 충실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아빠의 벗어놓은 팬티는 저의 자위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아빠가 벗어놓은 팬티를 몰래 제 방으로 가지고 와 아빠의 좆 냄새가 나는 부분으로 제 보지를 비비는
그 기분이란 지금 생각하여도 그 흥분이 짜릿하게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저의 음란한 기질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자위는 처음 자위를 배운 후로 계속 되었습니다.
아빠의 좆 냄새가 나는 곳에 제 씹물을 묻혀 도로 있던 곳에 놓아두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제 자위의 대상이 또 한 명이 더 생겼습니다.
아~!
몇 일전 삼일절이 지났군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을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아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구슬프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 육사님의 청포도를 낭송하시던 국어 선생님은 나의 절반이었습니다.
그 뜻을 이야기하시는 선생님의 모습만 보아도 제 보지에서는 씹물이 흘렀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라는 그 벽도 아빠와 딸이라는 벽만큼 높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국어 선생님의 품에 단 한번만이라도 포근하게 안겨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학생은 비단 저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저를 비롯한 많은 여학생들은 서로 다른 여학생들을 경계하고 국어선생님을 좋아하는 기미만 보이면 멀리하였습니다.
현자도 미란이도 경애도.....
라이벌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상급생 하급생까지도......
심지어는 여선생님까지도....
국어 선생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모든 여자들이 우리 여학생의 시기의 대상이었습니다.
또 그렇게 다정하게 걸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 일부러 수업이 끝이 나면 별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며 교무실까지 나란히 걷고싶은 마음을 가진 여학생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였으니까요.
그러나 국어선생님과 남 모르게 일 대 일로 만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아~이제야 정확하게 생각이 납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의 수학여행을 가서입니다.
저녁에 먹은 음식이 무슨 잘 못이 있었는지 저는 심한 복통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SOS를 요청하였고 선생님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을 하고 아이들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시고는 술자리를 막 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선생님도 먼저 나서시지를 못 하였으나 유독 술을 멀리하시던 국어 선생님이
급히 저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힘차게 달려가 링거를 맞게 하시고 약도 타 주셨습니다.
아파서 선생님의 등에 업혀 가면서도 그 포근함은 제 가슴을 울렁울렁하게 하였습니다.
병원이 아주 멀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고......
김 유나, 수학여행 와서도 선생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냐병원에서 나오시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더 흥분시켰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하고 선생님에게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었습니다.
요놈 봐라하시며 선생님은 웃고있는 제 뺨을 살며시 꼬집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우상 이예요하고 환하게 웃자
요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하시는 선생님의 어깨에 닿은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정말 이예요하고 말하자